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왜곡/TV조선 (문단 편집) === 시민군이 여섯 차례 교도소에 습격했으나 광주 시민들은 교도소에 습격한 적이 없다고 증언한 것이 북한군이 개입했음을 나타내는 근거다? === (07분 40초)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사진3.jpg]] >장성민 : 지금 그렇게 내려왔다라고 하는 그런 근거는 어떤 사실에 기초해서 지금 말씀을 하시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임천용 : 글쎄, 그, 근거를 우리한테 직접 말하라고 좀 하면 우리가 좀 황당한 측면이 있죠. 왜냐면, 너무나도 뻔한 사실이고 너무나도 진실된, 그런, 에? 사실인데. 여기다 근거를 대라하고, 우리를 반대로, 좀 우리가, 질문을 드릴 수 있어요. 다른 분들한테. >장성민 : 그게 너무나도 이 뻔한 사실인데, 뻔한 사실이 어떻게 확인되고 어떻게, 어떤 자료에 근거하니깐라고 하는 부분만 이야기를 계속 하시면서 하시면 됩니다. >임천용 : 예, 그리고 우리, 저번에도 몇 마디 나와서 몇 마디 제가 말씀드렸지만 그럼 우리 광주 사태 현장을 가봅시다.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교도소 사건 여섯 차례, 이, 시위대에 가담했던 분들은 안 했다고 했어요. >장성민 : 네. >임천용 : 자기는 할 이유가 없다고만 했습니다. 분명하게 재판장에 나와서도 얘기했습니다. 그럼 누가 했습니까? 우린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한테 대답을 할 필요가 있고. …… (35분 10초)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사진4.jpg]] >장성민 : 지금, 그, 우리 임천용 대표께서 주장한 주장들을 보면. 그동안의 이제 광주 시민 분들은, 우리는 무기 탈취를 하지 않았다. 교도소 절대 습격하지 않았다, 총기 탈취 절대 안 했다는 거죠. >이주천 : 예예. >장성민 : 그리고 확산시키려 하지 않았고. 우리가 민주화 운동을 하는데 왜 복면을 쓰고 하는 거냐. 복면 쓰지 않았다. >이주천 : 예. >장성민 : 또, 이, 그 장갑차, 이런 거 우리가 직접 몰면서, 탄창 가지고 어? 무력 행사하지 않았다. 이런 부분들이 지금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시민군들이 그걸 부인했는데. >임천용 : 그렇죠! 임천용이 가지고 있는 근거가 전무하다는 것을 다시 보여주는 부분이다. 임천용은 시민군이 여섯 차례 교도소에 습격한 것을 그 증거로 내놓고 있으나, 논리적으로 이것이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것이 근거로서 적합한지를 떠나, 시민군이 여섯 차례 교도소에 습격했다는 주장은 1980년 5월 당시 계엄사의 허구적인 발표를 그대로 가져온 것에 불과하다. 1980년 5월 31일, 계엄사는 성명서를 통해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일부 불순분자에 의해 일어난 폭동 사태로 규정하고, 시민군이 다섯 차례 교도소에 습격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동아일보 편집부, <戒嚴司 발표 「光州事態」>, 『동아일보』, 1980년 5월 31일, 3면.] 이후 지만원 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신군부의 주장을 확대해 시위대가 광주 교도소를 6회에 걸쳐 공격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지만원, 『수사기록으로본 다큐멘터리 역사책 압축본 12. 12와 5.18 하』(도서출판 시스템, 2009), 455.]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교도소 수비 작전은 교도소 습격을 막기 위해서가 아닌, 5월 21일 광주 지역의 외곽을 차단하기 위해 실시된 광주외곽봉쇄작전의 일환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1980년 당시 계엄사 충정 작전 보고서에 기록된 외각봉쇄 작전부대 및 봉쇄지역 목록이다:[* 계엄사, 「충정 일일주요업무 상황」, 1980년 5월 23일(국방부,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년 7월 24일, 93에서 재인용)] 외곽봉쇄 작전부대 및 봉쇄지역(5. 21~5. 24. 09:00)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TV조선/외곽봉쇄작전부대및봉쇄지역.jpg]] 5·18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은 계엄군의 횡포를 알리기 위해 외곽으로 진출해야 했는데, 이 당시 계엄군은 광주시 외부로 나가는 교통로를 봉쇄할 것을 지시함과 동시에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하는 계엄군들에게 “무기 휴대 폭도의 봉쇄선 이탈 절대 거부, 폭도 중 반항치 않는 자 체포, 반항자 사살, APC 또는 차량을 이용 강습 시도시는 사살, 현 봉쇄망은 주도로만 치중치 말고 지선도로도 장악 폭도 탈출 적극 방지” 하라는 지침을 내리게 되었다.[* 국방부,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년 7월 24일, 94.] 이 때문에 신군부는 광주교도소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을 마치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설명했다.[* 국방부,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년 7월 24일, 95.] 1995년 검찰 조사 결과에서도 광주 봉쇄 과정에서 계엄군이 22일 광주교도소 부근을 통과하던 한 가족을 시위대로 오인, 총격을 가해 가족 3명에 총상을 입히게 된 사건을 언급한 바 있다.[* 연합뉴스. 1995.「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2013. 05. 17)] 이와 관련해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교도소장이었던 한도희 씨는 1995년 지방 일간지에서의 인터뷰에서 "시민군이 80년 당시 光州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연합뉴스. 1995.「"5.18 당시 시민군 光州교도소 습격 사실무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64241|#]] (2013. 05. 17)] 따라서, 시민군이 여섯 차례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주장은 그것의 근거로서의 적합함을 따지기 이전에 80년 당시 신군부의 발표를 그대로 되풀이한 잘못된 주장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